산업화가 진행되던 프랑스 공업도시 리용에서 태어나 1850년 사제로 서품된 후 리용의 변두리 ‘라 기요띠에르’라는 서민동네의 성 안드레아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한다.

1856년 5월  론강이 홍수로 범람하게 되어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 주민들의 생활상을 목격

1856년 6월  철저한 가난의 삶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평신도 카미유 랑보와의 만남 

1856년 12월  성탄밤 구유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묵상하며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특별한 은총을 받으셨다.

슈브리에 신부님은 ‘프라도는 이순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성탄절 밤, 우리 주님의 가난과 인간들 가운데서 그분의 낮추심을 묵상하면서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될 수 있는대로 가장 가난하게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나를 회심시킨 것은 강생의 신비입니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할 동료 사제를 찾았으나 당시 부르주와적 생활에 익숙한 사제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어 자신이 스스로 가난의 삶과 사도적 삶을 살게 된다.
평신도 카미유 랑보가 운영하는 아기 예수 마을(이재민과 빈민들을 위한 주택촌) 지도신부로 들어간다.

“불쌍한 꼬마들, 이 아이들은 정말 가련합니다. 벽돌이나 집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만 이 아이들은 다시 오지 않고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못 가게 말리면서도 오히려 다른 곳으로 가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있을 곳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봉사하는데 건축이 중요하다는 랑보에 반해 슈브리에 신부님은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마을에서 문제아들에게 복음을 전한는데 헌신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영혼과 교리교육이 우선이었던 슈브리에 신부는 랑보와의 이러한 의견차이로 마을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