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수녀회는 프랑스 리용에서 시작되었다.


1857년 슈브리에 신부가 ‘아기예수의 마을’의 전담신부로 있을 때, ‘마을’에서 ‘자매’라 불리는 여성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슈브리에 신부에게 고백성사를 보던 22세의 아가씨 마리 브와쏭도 견직물공장에서 일하며 ‘경로수녀회’ 입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슈브리에 신부의 제안에 계획을 바꾸어 ‘아기예수마을’로 와서 일하게 된다. 그녀가 바로 프라도수녀회의 첫 원장이 된 마리 수녀이다.

 


교리교사의 양성과 가난한 사제의 양성이라는 슈브리에 신부의 이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마리 수녀는 1860년 12월 10일, 슈브리에 신부가 ‘아기예수 마을’을 떠나 프라도 집을 마련하자 소녀들의 첫영성체 교리를 맡고, 창립자를 도와 앞으로 프라도에서 이루어질 사업, 즉 시기를 놓친 어린이들의 첫영성체와 더불어 그들에게 필요한 인성교육, 종교교육을 담당한다.

 

슈브리에 신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프랑스 전역에서 지원자들이 찾아와 공동체는 급성장한다.

       

 

프라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교리교육’이었고 점차적으로 지역에로 눈을 돌려 가정방문, 환자들을 위한 봉사로 확대되었다. 슈브리에 신부와 함께 본당에 파견되어 학교교육과 교리교육에 투신했다. 점차 청소년 재교육 센터와 장애인 센터로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에 투신하게 된다.

     

1936년, 프랑스 사회와 교회의 급속한 발전, 변혁과 더불어 프라도에도 변화가 요구된다.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기숙사와 가톨릭 액션단체 동반 등 새로운 사도직의 요청을 받는다. 또한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들을 찾아가 만나기 위해 본당을 떠나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안에서 소공동체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하신 창립자의 정신을 따른 공동체를 실현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1959년, 로마의 ‘노동사제’ 금지 처분 이후 가톨릭액션단체 지도자들은 수녀들에게 공장 노동을 요청한다. 이 부르심 앞에 기도생활, 공동체 생활, 사복등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된다.

1961년, 몇 명의 프라도 수녀들이 사복차림으로 공장에서 일하도록 교황님께 허락을 구해 승인을 받는다. 이리하여 프라도 수녀들은 가난한 노동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함께 노동하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고, 그들에게 주님을 직접 알리게 되었다.

1958년 모로코 진출을 통해 국제 수도회로서 첫출발을 한다.

이어 이탈리아, 칠레, 스페인, 알제리, 인도, 한국, 방글라데시, 콜롬비아, 마다가스카르에 차례로 진출하여 서로 다른 민족, 문화, 사고방식을 초월하여 같은 카리스마에로 부름 받은 수녀들이 지역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사도직 안에서 동일한 프라도의 정신을 살고 있다.
 


1970년부터 노동계의 복음화를 위해 노동현장에서 수도복 없이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여성회원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격려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김추기경은 프랑스의 ‘프라도수녀회’가 이 여성노동자들이 바라는 수도생활과 잘 부합된다는 것을 아시고 즉시 한국에 진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75년 8월 28일, 두 명의 수녀가 한국에 도착, 이후 몇몇 여성노동자들이 청원기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